35번 국도를 따라 봉화를 지나 태백으로 향하는 길은 경북과 강원의 가을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범바위 고개에서 내려다보이는 굽이치는 물길과 단풍의 잔상은 태백 시장의 활기 속으로 이어집니다.
그 시장 한복판, '설비'가 아닌 '실비'라는 이름으로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현대실비집에 닿았습니다.

안동에서 출발해 35번 국도의 호젓한 풍경을 만끽하며 달려온 길 끝에 태백이 있습니다.
이젠 탄광의 불꽃은 꺼지고 그 흔적만이 남은 도시지만, 여전히 이곳을 지키는 실비집들은
광부들의 든든한 먹거리였던 시절의 온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아끼는 현대실비집은 화려한 수식어보다 정직한 고기 맛으로 손님을 맞는 곳입니다.

식당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기를 썰고 있는 주인장의 모습입니다.
60대로 보이는 사장님은 빛바랜 면 셔츠 위에 얼룩이 묻은 빳빳한 앞치마를 두르고,
투박하지만 숙련된 손길로 한우를 발골하고 있습니다. 칼이 뼈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식당 안을 채우고,
손때 묻은 무거운 철판이 테이블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내부지만, 집기들은 기름기 없이 정갈하게 관리되어 주인장의 성품을 짐작게 합니다.
이 집의 백미는 신선함 그 자체인 모듬 한우입니다.
바로 옆에서 해체된 고기는 선홍빛 결이 고우며, 육즙을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철판 위에 고기를 올리면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풍미가 피어오릅니다.
앞뒤로 노릇하게 익힌 고기를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 등급을 따지는 것이 무색할 만큼 진한 감칠맛이 전해집니다.
특히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말린 도라지 무침은 쫄깃한 식감과 쌉싸름한 향으로 입맛을 돋워줍니다.
직접 담근 된장에 우거지를 푹 고아낸 된장찌개와
잡내 없이 시원한 선지 해장국은 고기 뒤에 찾아오는 완벽한 마무리를 책임집니다.


태백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들어선 식당에서 따뜻한 국물과 고기 한 점에 마음까지 데워지는 경험은 특별합니다.
방송을 타며 웨이팅이 길어지기도 했지만, 주인장의 묵묵한 칼질과 진한 된장 향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태백의 역사와 사람들의 온기가 서린 이 공간은 단순한 식당을 넘어 지친 여행자에게 건네는 한 수저의 위로와도 같습니다.

주소: 강원 태백시 시장북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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